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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이란 중동 분쟁으로 알아보는 교황청의 위선.

이스라엘-이란 충돌과 교황청의 중립: 평화의 외피 뒤에 숨은 무력함

중동에서 불붙은 전면 충돌

수십 년간 중동은 이스라엘과 이란 간 이른바 ‘그림자 전쟁’의 무대였습니다. 이란이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스라엘을 “시온주의 정권”이라 규정하며 적대해온 반면,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장 시도를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오랜 세월 간접적 충돌로 이어지던 이들의 관계는 2025년 6월, 마침내 전면적인 군사 충돌로 비화했습니다.

6월 13일, 이스라엘은 이란 핵시설에 대한 선제 공습을 감행했습니다. 테헤란 인근의 나탄즈 핵시설, 혁명수비대 사령부 등 핵심 거점이 타격을 받았고, 고위 군 간부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보복한 이란은 탄도미사일과 드론을 동원해 이스라엘 주요 도시에 연쇄적인 공격을 가했으며, 민간인 피해도 발생했습니다. 이틀간의 충돌로 이란에서 최소 78명이 사망하고, 이스라엘에서도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방사능 누출 우려까지 불거진 이 상황에서,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보다 강력한 대응”을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분쟁은 국지전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리아, 레바논, 예멘 등 이란의 우방 지역에서도 긴장이 고조되었고,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들까지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공격은 중동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며 규탄했고,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가자 학살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의도된 도발”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유럽 주요국들은 외교전을 벌이며 군사적 억제력을 보강하고 있지만, 사태는 여전히 확전의 위험 속에 놓여 있습니다.


레오 14세 교황의 ‘중립’ 연설

이 같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6월 14일 로마 교황 레오 14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긴급 연설을 발표했습니다. 교황은 “책임과 이성을 호소한다”며 “타국의 존재를 위협해선 안 된다”는 원칙을 강조했습니다. 핵무장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핵심 당사국 양측 모두에 자제와 대화를 촉구하는 중립적 어조를 유지했습니다.

이 발언은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지향하는 듯 보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뚜렷한 한계를 드러냅니다. 교황은 공격의 발단이나 주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도의적 ‘등가론’을 펼치는 듯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이 사태의 직접적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해당 행위를 구체적으로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존재를 위협해선 안 된다”는 말은 옳지만, 정작 누가 그 위협을 먼저 가했는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를 도덕적으로 동일선상에 놓는 효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말뿐인 도덕성, 현실의 무력함

교황청의 중립 외교는 도덕적 원칙을 바탕으로 하나,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역부족입니다. 바티칸은 군사력도, 경제력도 없는 소국이며, 오직 도의적 설득력에 기대어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쟁에서는 이마저도 제한적입니다. 레오 14세의 평화 호소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이란은 무력 시위를 멈추지 않았고, 국제사회의 외교 노력 없이 교황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당시의 사례를 떠올려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그는 러시아를 명시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전쟁은 인류의 패배”라는 추상적 언명에 머물렀습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강한 반발을 샀고, 교황청의 도덕적 신뢰성에도 금이 갔습니다. 이번 이스라엘-이란 사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의 언어를 반복하면서도 핵심 쟁점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유보함으로써, 다시 한번 도덕적 무기력함을 드러낸 셈입니다.


선택적 개입과 이중잣대

교황청의 외교적 중립은 일관된 윤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외교적 유불리에 따라 조정되는 선택적 개입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중동 문제에 있어서 특히 그렇습니다. 교황청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있어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하며 팔레스타인 민간인 고통을 언급하지만,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항상 신중하고 우회적인 언사에 머물렀습니다. 2023년 가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당시에도 교황은 “폭력의 악순환을 끝내야 한다”고 말했을 뿐, 가자 지구 폭격을 ‘집단학살’로 규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이란이 강경 발언을 할 경우에는 미묘하게 비판 수위를 높이며 상징적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모습도 포착됩니다. 이는 교황청이 중동 문제에 있어 윤리의 보편성보다는 외교적 실리를 중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킵니다.


침묵하는 정의, 선택적인 윤리

더 심각한 문제는, 바티칸이 강대국의 인권 탄압에 대해 침묵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 탄압, 홍콩 민주화 시위 탄압 등에 대해 국제사회가 분노했을 때, 교황청은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는 중국 정부와 체결한 교회 협약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지만, 그 결과 교황은 2018년 이후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조차 피하고 있습니다.

반면 유럽과 미국의 무기 산업, 이민자 정책에 대해서는 비교적 거침없는 비판을 이어왔습니다. 즉, 인권과 정의라는 보편 윤리는 대상에 따라 조절되고 있으며, 이는 교황청의 도덕적 권위를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론: 중립이라는 탈을 쓴 침묵

교황청이 강조하는 평화와 대화는 분명 이상적 가치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이 현실 정치에서 설득력을 가지려면, 때로는 명확한 입장과 정의로운 판단이 필요합니다. 침략자와 피침략자, 공격자와 희생자를 도덕적으로 동일시하는 ‘중립’은 결국 침묵과 방관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충돌의 한복판에서, 교황의 언어는 분쟁을 진정시키기는커녕 현실의 복잡함을 가리는 장막에 불과했습니다. 정의 없는 평화, 책임 없는 자제 촉구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교황청이 해야 할 일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침묵은 더 이상 중립이 아닙니다. 그것은 회피이며, 때로는 공모입니다.

22일 미국의 핵시설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이 발사한 미사일이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강타한 직후 구조대원들이 피해 현장을 살피고 있다. 사진출처= 로이터 연합뉴스